며칠째 내리는 장맛비로 온통 하늘이 잿빛입니다. 서늘한 날씨에 창가에 서서 밖을 보니 두 아이들이 생각납니다. 약 십 년 전 창원의 종합병원에서 소아신경 진료를 할 때 마산에서 온 세 살 정도 된 아이였습니다.
분만 중에 뇌손상이 있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두개골 및 뇌 모양이 변형과 손상돼 제 나이 또래들이 한참 뛰어다닐 시절에도 하루에 수십번씩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눈이 돌아가며 멍해지는 모양의 경련이 있었습니다. 뇌손상이 있기에 전신이 자유롭지 못해 항상 엄마가 안고 다니던 아이였습니다. 아이의 뇌파를 찍어봤더니 난치성 뇌전증 가운데 하나인 영아 연축성 뇌파가 보였습니다.
그 아이의 뇌파를 확인해 봤더니 정상인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케톤생성 식이요법이란 치료법을 시행했습니다. 일반인의 경우 금식을 하면 케톤이란 것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발작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금식을 하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되기에 1995년경부터 도입된 요법입니다. 케톤생성 식이요법은 인위적으로 지방을 80% 정도 먹여서 케톤을 만들어 줘 발작을 억제하는 방법입니다. 케톤생성 식이요법을 시행한지 1개월 정도 지났을 때부터 이 아이는 발작이 없어지고 뇌파도 정돈됐습니다.
아이의 상태가 호전되고 난 뒤 부모가 기뻐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제 컸으면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나이가 됐을 텐데, 어떻게 컸을까 보고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걱정입니다.
'발작이 조절됐다 하더라도 뇌손상이 있어 돌보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텐데', '아이 엄마가 해줄 수 있는 한계를 느낄 텐데'. 엊그제 뉴스에서 봤던 일본의 간병살인이 떠올라 한편으론 무겁기만 합니다.
불가피하게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거나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되는 아이들이 수 천명 이상입니다. 과거보단 좋아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보호자가 모두 책임져야 되는 현실이 참으로 씁쓸합니다.
작년 추석 무렵에는 진해에서 사는 또 다른 아이 부모가 '고맙습니다'란 리본 글귀 붙은 예쁜 꽃바구니를 들고 와 선물해줬습니다. 제게 수년째 뇌전증 치료를 받고 있는 아이입니다. 중학생이었던 아이는 대학생이 됐고 군에 입대한다고 얼마 전 병사용 진단서를 발급받아 현역 2급 판정을 받아 현역 입대 예정입니다.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잠을 자지 않는 스트레스 등으로 증세가 재발할 수 있다고 훈련 시 배려해 달라는 소견서를 써줬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일말의 불안감이 남았습니다. 책꽂이를 뒤적이다 '백석 시집' 한 권을 주며 훈련받으며 힘들 때마다 한 편씩 읽어보라고 줬더니 인사를 꾸벅했습니다. 이제는 청년이 된 아이의 등을 두드려 주며 힘줘 악수를 했습니다.
4년 정도 약물 치료를 했고, 약을 끊고 2년 정도 재발이 없어 완치 판정을 받은 아이가 건장한 청년이 돼 덧니를 드러내고 어색한 웃음을 짓는 어른이 된 것을 보니 민간요법이나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않고 따라준 아이 부모님과 그 아이가 너무나 고맙게 느껴집니다.
큰 딸아이와 비슷한 연배라 더욱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별 탈 없이 어려운 치료시기를 견디고 약도 끊을 수 있음에 돌아서 가는 청년과 부모님의 뒷모습에 감사의 인사를 하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건강한 아이 키우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갑자기 눈 깜빡이는 아이들-틱 장애 (0) | 2021.10.09 |
---|---|
아이들의 스마트기기 중독의 문제점 (0) | 2021.10.09 |
아이들 장염을 어찌 할까요? (0) | 2021.10.09 |
뇌전증 환자는 운전을 어떻게 해야 할까 (0) | 2021.10.09 |
아동학대-그 심각성에 대하여 (0) | 2021.10.09 |
최근댓글